102세의 사할린 동포, 다 잊어도 ‘아리랑’은 기억에 남겼다 [밀착취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란 긴 터널로 몇 년간 우리 최대 명절인 설에 가족 간 만남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제 곧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는 등 다시 진정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 설이면 한 해를 시작하고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 등을 만난다는 설렘이 가득하다. 하지만 설에 고향도 갈 수 없고 가족도 만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돼 탄광과 비행장 건설, 철도 건설 등 극심한 노동을 했던 사할린 동포다.

박점이 충북 음성사할린동포회장 결혼식에서 가족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점이 음성사할림동포회장 제공

◆102세 친정어머니 딸은 기억 못 해도 ‘아리랑’은 불러요

설 연휴 전날인 20일 충북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 사할린경로당에서 박점이(72) 음성사할린동포회장을 만났다. 그는 사할린에서 태어난 사할린 동포 2세다. 남편 유무문(82)씨와 2009년 영주 귀국했다.

박 회장은 먼저 휴대전화를 살피더니 넌지시 건넸다. 휴대전화를 건네받자 “아리랑~아리랑~” 또렷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박 회장은 “친정어머니예요”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잠시 뒤 “친정어머니는 올해 102살이에요. 딸 이름도 얼굴도 잘 못 알아보는데 아리랑은 하루에도 몇 번씩 또렷하게 부른다”며 “사할린에서 동포들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한이 쌓일 때 등 언제나 아리랑을 부른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친정어머니 박화자 할머니는 사할린 동포 1세다. 사할린에서 고된 노동과 나이 탓에 탄광 일을 그만둔 친정아버지와 나무를 하거나 광주리를 만들며 가족들의 생계를 이었다. 친정 어미니 박 할머니도 2007년 영주 귀국해 인천에 살고 있다. 고령 탓인지 코로나19가 시작하면서 병석에 누웠다. 최근엔 사람도 제대로 못 알아본다.

박 회장은 “일본이 우리 국민을 강제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 가까이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숨지거나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모진 세월을 보냈다”며 “그런 동포들의 삶에 아리랑은 희망이고 슬픔이고 그들의 삶이었다”고 했다.

박점이 충북 음성사할린동포회장. 윤교근 기자

◆병석에 누워 계신 친정어머니 병시중 마지막 소원

박 회장의 마지막 소원은 수년째 병석에 누워 있는 친정어머니의 병시중이다. 친정어머니가 인천에 사는데도 쉽게 이사를 하지 못해서다. 그는 “친정어머니가 있는 인천으로 이사 가기 위해 여러 차례 신청했으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의 주거비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절차를 밟아야 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부산에 있는 한 동포도 한국에 있는 딸과 생활하고 싶어 이사를 원하는 등 많은 사할린 동포들이 이사 문제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친정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건강을 챙긴다. 태권도도 검은 띠라고 자랑하고 수영도 꽤 한다고 했다. 그는 최근 일반 이사 신청을 해서라도 친정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을 곁에서 지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주거비 등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일해서 돈을 벌어 주거와 생계를 해결하려 해도 1인당 50여만원 정부 지원금조차 중단될 수 있어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한다.

충북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 사할린경로당에 새해 축복을 기원하는 글과 그림 걸려있다. 윤교근 기자

◆더 마음 시린 설

박 회장의 올해로 14번째 설을 맞는다. 설 풍습도 세 번의 변화를 겪었다. 사할린에선 1월 1일에, 카자흐스탄에서 새싹이 돋는 3월 22일(나우르즈)에 새해를 맞았다. 한국에선 옹기종기 모인 가족은 없지만, 동포들과 함께 음력 1월 1일 설에 떡국을 먹었다. 이번 설도 사할린경로당에서 동포들과 함께 보낼 참이다.

새해를 맞는 설엔 박 회장은 마음이 더 시리다. 영주귀국 정책에 대상자를 배우자와 장애인 자녀 1명만 동반할 수 있도록 제한해 올해 45살 아들과 42살 딸, 10대 손주들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남겨 두고 떠나왔다.

그의 설 추억은 그리움과 한숨의 연속이다. 사할린에선 친정 부모가 고국을 그리워하고 카자흐스탄에선 시부모가 고국을 그리워하며 긴 한숨으로 보냈다. 한국에선 카자흐스탄에 두고 온 자녀와 손주가 그리웠다. 그나마 휴대전화 영상통화로 얼굴과 목소리를 들으며 위안으로 삼는다.

박점이 충북 음성사할린동포회장이 사할린 결혼식. 박점이 음성사할린동포회장 제공

그는 “사할린 동포 1세는 사할린과 카자흐스탄에서 설이나 명절 때 이웃들과 즐겁게 지내다가도 주위가 조용하면 고향이 그리워 한숨을 짓거나 눈물을 훔친다”며 “어려선 고국을 그리워하는 부모 때문에, 결혼해선 시부모 때문에, 한국에 와선 카자흐스탄에 있는 아들과 딸, 손주들 때문에 설이나 명절이면 쓸쓸하고 마음이 더 싸하게 시린 느낌”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여기 있는 사할린 동포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고령인 사할린 동포 수는 해마다 줄고 있다. 음성군엔 처음 영주귀국 당시 70명이었던 사할린 동포가 현재 25명 남았다. 이사를 한 이도 있지만 13명은 사망했다.

정부는 2021년 시행된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전문기술이 있는 동포에게 출신 국가 구분 없이 재외동포 자격(F-4)을 주고 있다. 또 영주귀국 대상자를 8촌 이내 직계비속 1명과 그 배우자를 포함하는 등 확대했다. 하지만 손주 등 떨어져 있는 사할린 동포의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긴 어렵다.

사할린에서 열린 박점이 충북 음성사할린동포회장 시아버지 환갑잔치. 박점이 음성사할린동포회장 제공

박 회장은 “사할린 동포 1세, 2세의 나이가 많아 거동이 힘들면 가족이 더 그리워질 것이고 생을 마감할 땐 더 그럴 것”이라며 “사할린 동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그들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사할린 동포 강제 이주는 1938년부터 1945년 이뤄졌다. 당시 사할린 남쪽을 통치하던 일본은 오랜 전쟁 속에 목재업과 탄광, 어업 등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다. 이에 1938년 4월 물자와 노동력을 총동원하는 ‘국가총동원령’을 발표했다. 이어 1939년 7월 ‘국민징병령’을 발표했다. 또 사할린에 있던 이주 한인들에게도 ‘국가총동원령’으로 이른바 ‘현지 징용’했다. 당시 강제 동원된 한인은 15만여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패전한 일본은 한인들을 방치한 채 자국민만 배에 태우고 떠났고 노동력이 필요했던 옛 소련은 한인들의 귀향을 막았다. 이때부터 4만여명의 한인은 무국적 상태로 사할린 코르사코프항구에서 오지 않는 귀국선을 눈물로 기다렸다.

음성=윤교근 기자 sege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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